서애의 생애 서애는 1542(중종37)년 10월1일 외가인 의성군 사촌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이현 호는 서애 이름은 성룡이다.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중영이고 어머니는 안동 김씨다.  서애는 이 둘 사이에 둘째 아들이었다.  할아버지는 간성군수를 지낸 통훈대부 공작이다.  서애 가문은 6대조인 종혜 때 풍산에서 하회로 옮겨와 살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군수와 관찰사를 지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하회의 너른 들판에서 생산된 물산이 크게 한몫했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일족의 살림살이는 사족으로의 진출로 이어졌다. 안동에서 사촌으로 이거한 외가 또한 지역 사회에서 경제적 기반이 튼실한 유력 가문이었다.  서애는 이러한 양쪽 가문의 든든한 경제적 지원을 등에 업고 4살 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하여 8세 때에 맹자를 읽었고 13살에는 대학과 중용을 공부했다. 그리고 14살에는 강원도 간성군수로 있던 할아버지 지역의 향교에 나아가 글을 읽었는데, 주로 정통 성리학 중심의 공부였다.  서애가 더 높은 학문의 단계로 나아가고자 스승 퇴계를 찾아간 것은 21살 때였다. 형인 운룡과 함께 도산에 머물면서 다양한 유학 이론에 관해 깊이 탐구하는 시간이었다.  특히 성리학의 이론을 정리한 ‘근사록’에 대해 스승 퇴계에게 집중적으로 묻곤 했다. 퇴계는 이런 서애에게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며 큰 유학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학봉 김성일은 이 일을 두고 서애에게 말하기를 “내가 선생 밑에 오래 있었으나, 한 번도 제자를 칭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대만이 이런 칭송을 들었다”고 했다.서애는 22살에 동당 초시에 합격하고 그 다음해에는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24살에 성균관에 입학하고 25살에 대과에 급제했다. 그가 문과에 급제하고 받은 첫 벼슬은 승문원 권지부정자였으나 이듬해 예문관 검열겸 춘추관의 기사관이 되었다. 이때 아버지 중영은 충청도 청주의 수령으로 있었고 종숙부 경심은 호조 참판을 거쳐 병조참판으로 있었다. 서애의 벼슬길은 28세에 성균관 전적에서 공조좌랑이 되고 30세에는 병조좌랑, 32세에는 관직의 꽃인 이조좌랑에 올랐는데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하지만 이 해에 아버지 중영이 세상을 떠난 까닭에 3년간 시묘를 하고 35살에 사간원 헌납으로 돌아와 36세에는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 그리고 38세에 홍문관 직제학이 되었을 때는 경연에 나아가 임금 앞에서 자신의 견해를 소신 있게 밝히곤 했다. 40세에 이르러 홍문관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부제학이 되었으나 42세 되던 해 왕실 족친 경안령 이요가 선조 앞에서 “동인의 우두머리인 유성룡·이발·김응남이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것을 억제해야 한다”고 청하자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하회에 내려와 독서로 소일했다.  안동에 머무는 동안 함경도 관찰사를 비롯한 여러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47세에 형조판서가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연달아 역임하는 와중에 정여립 모반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그가 속한 동인이 크게 정치적 탄압을 받아 죽거나 다쳤다. 선조는 위세를 떨치는 서인을 견제할 목적으로 동인의 우두머리인 서애를 우의정으로 임명했다가 50세에 이르자 문관의 벼슬자리를 담당하는 이조판서를 겸직하는 좌의정으로 앉혔다.   임진왜란 발발 그의 나이 51세 되던 1592년(선조25)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그에게 군사관련 업무를 모두 지휘하는 병조판서까지 겸임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영의정까지 맡겼다. 하지만 왜란 초기 패전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파직되었으니 이내 복귀가 이뤄졌다. 군량보급을 비롯하여 군사관련 업무 처리에 그만한 능력자가 없자 임금은 그해 6월에 서애를 풍원 부원군으로 임명하고 12월에는 평안도 도체찰사를 맡겼다.  52세에는 호서 호남 영남을 관장하는 삼도 도체찰사를 다시 더했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전시 군사업무를 모두 관장하는 것이었다. 서애는 10월에 다시 영의정에 올랐는데 이때 각처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정예병을 뽑았다.  53세에는 문경새제 방어시설을 축성하는데 공력을 다했다. 왜적의 한양 입성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4월에는 군량미 확보를 위해 지방특산물을 공물로 바치던 것을 쌀로 대신하게 했는데 이것은 조선 후기 시행했던 대동법의 모태가 되었다. 겨울에는 임금에게 군국기무 10가지 방안을 올렸다.  54세에는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된 이들의 억울한 원한을 풀어주기를 선조에게 간청해 억울하게 희생된 많은 동인들을 구제했다. 12월에는 유조인이 상소를 통해 종을 뽑아 군대에 보내는 것은 잘못된 정책이라고 비판하자 종도 국민이며 나라가 어려울 때는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55세 때는 현재 살고 있는 마을을 중심으로 군대를 편성하는 군사 훈련 규칙을 각 시도에 보내 생업에 지장이 없도록 했다. 56세인 1597년 1월 정유재란이 일어났는데 2월에 그가 경기도를 순찰하는 사이 이순신이 파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해상 병권이 원균에게 넘어가 호남이 적에게 유린되었다. 서애는 영의정 사직 상소를 여러 번 계속해서 올렸다.  드디어 57세에 이르러 북인들이 일본과 화친을 주장했다는 구실을 앞세워 서애를 탄핵했다. 이해 10월 벼슬을 버리고 고향 하회로 돌아와 옥연서당에 머물며 저작에 몰두했다.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징비록’은 임란의 주요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난후잡록’은 임란이후의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59세는 풍수지리에 관한 ‘신종록’과 의학 관련 서적이 ‘침구요결’을 지었고 그 다음해에는 임금에게 올린 글을 모은 ‘근폭집’과 예에 관련된 것들을 모은 ‘상례고증’을 지었다. 고향 안동에 내려온 지 9년만인 1607년 5월 7일 66세의 일기로 영면했다. 풍산 수동리에 묘소가 있다.   학문과 사상 서애는 퇴계의 애제자답게 성리학의 본류를 지키고자 하는 스승의 뜻을 충실하게 따랐는데 이는 후에 그가 퇴계 학맥은 물론 성리학의 바른 계통을 이어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아래의 일화에서도 충분하게 감지할 수 있다. 서애가 선조 즉위 초 성절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이 나라 유학자 가운데 으뜸가는 스승이 누구인가?”서애의 물음에 중국의 유생들이 왕양명과 진백사라고 대답했다. 이에 서애는 “진백사는 학문이 정밀하지 못하고 왕양명의 학설은 오로지 불교의 선종에서 나왔으니 설문청의 학설이 순수하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고백도 서애의 정통 유학으로의 나아가려는 지향 같은 것이다. “내가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 일시적으로 육상산의 유학이론을 좋아했다. 그러나 금계의 산속에서 어떤 늙은 중이 불경과 대혜 종고 어록인 서장을 가져와 주기에 한가한 틈에 읽어보았더니 내용이 육상산의 사상과 비슷하였다. 특히 육상산이 대혜의 글들을 고쳐 유교 학설을 만든 것을 알고 난 이후에는 오로지 주자의 학설만 돈실하게 믿었다”며 서애는 성리학 본류의 사서삼경 말고도 예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의례와 예의범절에 관한 학설을 주의 깊게 들여다봤는데 이것 또한 정통 유학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당시 유학자들이 거의 무관심했던 군사학·의학·국학·지리학·농업·어염업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의 병법이론은 기강확립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군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군대 안의 질서를 바로 잡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유능한 장수를 뽑아 전략과 전술을 제대로 세우고 무기와 군량 보급에 최선의 시스템을 만들어 낼 때 강군이 될 수 있다고 설파했다. 농업에 있어서는 황무지 개간과 둔전 설치를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이 같은 상황은 임란이라는 전시에서 군량 공급과 백성 구제라는 절박한 사정 때문에 그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었다. 특히 피난민의 노동력을 활용한 농장경영은 전시 식량보급에 큰 활로가 되었다. 서애는 소금을 만드는 일에도 관심이 많았다. 당시 소금은 식량 못지않은 중요한 생필품이었는데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다양한 시책을 제시했다. 서애의 의학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병약한 몸을 돌보고 나아가 질병으로부터 고통 받는 이들을 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의학 입문서를 오랫동안 탐구하며 침과 뜸을 연구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이러한 가풍은 누이의 아들인 국창 이찬이 임금의 병을 여러 번 고치고 백성에게 인술을 크게 펼치는데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서애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 문학에 관심이 컸다. 그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 잘 다스리기 위해서도 국사를 편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춘추관을 설치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제자들에게 그 지역의 역사서를 편찬하게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지리와 지도제작에 애착을 가지고 공국지도를 제작했는데 이것은 국방은 물론 행정에도 크게 기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최종편집: 2025-05-09 14:3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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