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에서 경당종택을 가려면 봉정사 방향으로 길을 잡고 학봉종택을 지나 서후면소재지까지 들어와야 한다. 그리고 면사무소 조금 덜 간 지점에서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차로 5분 남짓 가면 우측에 고택이 보인다. 원래 경당고택은 스승인 학봉종택 인근에 광풍정과 제월대 칠계재고택과 같이 있었다. 고택이 지금 위치로 옮긴 것은 불과 60년 전이다. 경당종택은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ㅁ자형 건물이다.몇 년 전 경당종택 불천위제사를 곁에서 볼 기회가 있을 때 11대 장성진 종손이 언뜻 경당이 생전 스승 학봉의 제사를 아버지 제사 대하듯 했다는 말이 기억난다. 경당종택 불천위 제사는 종손이 손수 바늘로 땅콩을 찍어 올린 다음 밀가루 풀로 고정시키는 땅콩 고임을 꼬박 하루 걸려서 만드는 과정만 봐도 그 정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다. 지리적으로 보아도 경당이 학봉의 애제자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과 조건에서 종손의 말대로 그가 스승 학봉에 대해 얼마나 지극했는지는 후손의 조상 받드는 모습에서도 그 여여함이 그대로 이어져 왔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제월대와 광풍정 경당 장흥효의 강학공간인 광풍정은 바로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춘파마을 장세규 사적비와 칠계재 고택, 제월대, 그리고 지금은 60년 전 이건한 경당종택과 이웃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와가 형태의 환경친화적으로 지어진 광풍정은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 1564∼1633)가 1630년대에 초당 형태의 누각으로 건립하여 300여 문인에게 강학(講學)하던 유서 깊은 정자다. 광풍정 뒷편 자연 암석에는 경당이 직접 이름 붙인 ‘제월대’가 있는데 능주목사 김진화가 이곳 표면에 ′경당선생제월대(敬堂先生霽月臺)′라는 휘호를 남겼다. 경당이 향당에서 이름 높은 학자였던 만큼 이곳 광풍정에서 수많은 문인들을 가르쳤다. 그중 석계 이시명은 경당이 자신의 무남독녀 장계향(정부인 안동장씨)을 맡길 만큼 아끼는 애제자였다. 장계향은 19세에 출가하여 슬하에 7남3녀를 낳았는데 그중 이휘일, 이현일 등 대학자를 길러내고 말년에 갈암이 이조판서에 제수되어 정부인이 되었다. 10세 전후에 지은 「학발시(鶴髮詩)」, 「소소음(蕭蕭吟)」, 「성인음(聖人吟)」 등은 시상이 탁월한 명시로 평가되고 있으며 만년에 쓴 『음식지미방(飮食知味方)』,은 고조리서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시명과 장계향의 묘는 안동시 풍천면 수동에 있다. 경당의 학문과 사상안동장씨 26세손으로서 춘파(봄파리)파의 파조이자 불천위인 경당 장흥효는 17세기 전반 경북북부지역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젊어서 약 17년간 학봉 김성일(金誠一)에게서 경전을 두루 섭렵하는 등 학문의 요체를 전수 받았다. 스승 학봉이 1593년 타개한 후 하회에 낙향해 있던 서애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안동부사로 왔던 한강 정구에게도 7년간 배움을 청해 퇴계의 고제 3명을 스승으로 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 위기지학에 힘을 쏟아 갈아 이현일 등 수백명의 제자를 길러냈는데 퇴계 학맥이 그에게서 다시 정립되어 전파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어 호방평(胡方平)의 《역학계몽통석(易學啓蒙通釋)》의 분배절기도(分配節氣圖)에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고증, 연구하여 20년 만에 십이권도(十二圈圖)를 만들었다.이는 12월과 24절후를 분배하고,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세월일진(歲月日辰)의 수를 그 위에 덧붙인 것으로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라 하였다. 이는 경당이 평생 이룩했던 공부이며, 퇴계학의 연원을 이루는 것으로 이 한 편만으로도 그의 학문이 인정받고 있다.장현광(張顯光)은 `참으로 다른 사람들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다`라고 극찬하였으며, 권유(權愈)·홍여하(洪汝河) 등도 그의 학문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였다. 경당은 평생토록 ‘경’을 붙들고 살았다. “경으로 안을 곧게 하면 만물이 이미 가운데 갖추어지고 의로써 밖을 방정하게 하면 본체가 일용의 사이에 드러나게 되어 체용이 나에게 있게 되고 천과 인의 간격도 없어지게 된다.”경당기에서 최현에게 말하는 것을 미루어 보아도 경당의 삶은 전형적인 ‘도학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광풍제월은 비갠 뒤의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깨끗하고 맑음은 마음을 비유하는 말의 경지에 이르고자 광풍정의 당을 경당이라 하고 정자를 광풍, 대를 제월대라 이름 붙였다.” 늘 배움에 충실하였고, 배운 바대로 실천하는 일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은 지경이 삶을 통해 ‘퇴계(이황)-학봉(김성일)’으로 이어지는 퇴계학의 적전자가 된 경당은 그의 학문을 외손인 존재 이휘일, 갈암 이현일 형제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승관계는 대산 이상정과 소산 이광정에게로 이어지고 소산과 대산의 학문은 또다시 말암 이재-정재 유치명-서산 김흥락으로 이어지는 퇴계 학맥도를 통해 오늘날 영남학파의 줄기가 형성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경당집 『경당집』 원집은 장흥효의 외손인 이휘일(李徽逸, 1619~1672)이 저자의 유고인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와 시문을 정리하는 한편, 서문·후지(後識)·행장·묘지 등의 부록 문자의 저술을 청탁하여 편차했으나 끝내 간행하지는 못했다. 이후 편자의 동생인 이현일이 습유(拾遺) 2편을 추가하여 1693년에 간행하였다. 간행 장소는 여러 기록을 토대로 보았을 때 경광서원인 듯하다. 속집은 저자의 후손인 장상규가 재차 자료를 수집하여 2권 1책으로 편집하고, 류범휴(柳範休)의 교정을 거쳐 1818년 경광서원에서 간행하였다. 이후 「광풍정중건기」, 「광풍정중건상량문」, 「봉림정사기」 등을 추가하여 1921년에 재차 간행하였다.『경당집』 원집과 속집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성암고서박물관 자료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국국학진흥원 도서관, 안동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원집의 경우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초간본이고, 속집은 안동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후쇄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