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변변찮은 사람에게 동정각 상량문을 지어보는 것이 어떠하겠냐고 원행 회주 스님께서 상운 주지 스님에게 물어왔다는 전갈을 듣고 한사코 손사래를 친 것은 그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 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홀연히 한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제 때 내리는 비처럼 아직 주위를 넉넉하게 품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를 갖추지 못한 데다 식견마저 화려한 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니 감히 누대의 역사와 은사께서 걸어간 화엄의 발자취를 담아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하여, 바라건대 검은 머리 기른 산림山林의 몸으로 먹고 마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잠을 자면서도 목탁과 독경의 청아함을 귓전으로 듣는 호사를 누리고 있으니 밥값하지 못한 허물을 조금이라도 갚으려는 아련한 심정으로 목욕재계 후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고 높고 높으신 석존 앞에 공손히 붓을 들어 삼세 부처님의 깨달음과 역대 조사의 진면목을 온몸으로 전할 수 있기를 서원하고 서원하옵니다.그간 스님과 거사와 보살에게서 들은 것 가운데 전할 만한 것을 고르고 고서의 자료에서 기록으로 남길 만한 것을 뽑아낸 기특함은 제천께서 기쁘게 흠향하시옵고 뒷날 이 글을 읽는 후인들께서는 예로부터 이곳에 깃든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신앙적 가치를 널리널리 이어가주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곳 용수사는 안동의 주산인 용두산(661m)정맥 줄기의 중턱,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다는 천하의 명당에 자리하고 있습니다.일본 천리대에 서첩 형태로 보관한 한림학사 최선이 쓴 개창 비문에 의하면 창건 이전부터 이미 고찰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나 실질적인 측면에서 용수사를 창건한 분은 봉화 각화사의 주지 성원스님이었습니다.그때가 고려 의종 원년인 1146년이었습니다. 뒤를 이어 그의 제자 처이가 몇 칸의 암자를 수십 칸으로 증축해 면모를 일신했으나 재정이 곤란을 겪자 각화사 주지인 석윤 대선사에게 이 일을 청원합니다. 1164년 의종을 만난 석운 대선사는 화엄사상을 역설할 가람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이를 수용한 의종의 결단으로 본격적인 대가람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일관 영위는 왕명으로 용두산과 용수사의 지세를 살펴보고 의종에게 절터로서 천하제일이라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이로써 의종 19년인 1165년에 요사와 강당 등 90여 칸이 석윤의 제자인 운미에 의해 조영되었고 불사를 주도한 석윤선사는 명종 3년인 1173년에 입적했습니다. 용수사의 완성은 석윤의 제자인 3대 각화사 주지 확심에 의해서였습니다. 경율론의 대장경을 갖추고 13층 청석탑을 호위할만한 대찰이었습니다. 1178년 명종은 이를 기념하고자 차와 향과 찬미하는 글을 보냈고 700여 사부대중은 장대한 낙성식을 거행했습니다. 용수사에 대한 왕실의 지원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옛절에 속했던 전시 10결과 할복사의 전 40결, 노비 30구 그리고 인근의 한전 40결 하사는 절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명종은 무신란에 의해 곤원사에서 이의민에게 허리가 꺾여 연뭇에 버려진 형 의종의 원혼을 달래고자 용수사를 왕실의 원찰로 삼고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용수사를 국왕의 원찰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이러한 역사적 유래에서 기인되었습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용수사는 유학의 본향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영남 좌도 유학자를 길러낸 공부방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퇴계 이황과 농암 이현보 집안과는 가학연원이라고 일컬어질만큼 특별한 인연을 맺었습니다. 한 예로 퇴계 선생의 조부인 참판공 계양이 용수사에서 독서여유산하고 있는 두 아들 식과 우에게 학업에 전념할 것을 당부하며 보낸 글과 퇴계 선생의 용수사 관련 시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고 있습니다.그 덕분에 퇴계의 숙부 송재 이우는 대과에 급제하여 안동부사와 호조참판을 역임할 수 있었습니다. 송재는 나라 일을 보는 와중에도 용수사에서 공부하고 있는 조카 온계溫溪 이해李瀣와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학문으로 가학을 계승할 것을 권학하는 등 실질적인 진성이씨 퇴계 집안의 중흥조 역할을 다했기에 지금도 사람들은 송재松齋없는 퇴계退溪 없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퇴계선생에게 용수사는 도학의 전당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물론, 중앙관직에 있다가 물러나서도 이곳에 머물곤 했습니다. 이 같은 시절인연은 퇴계선생이 처음으로 지은 수곡암과樹谷庵과 도산서당 건립으로 이어졌습니다. 퇴계 선생은 50세 되던 해에 용수사 설희雪熙스님에게 부탁하여 지은 이 집의 기문에는 “동당東堂은 유생이 서당西堂은 설희雪熙스님이 거처한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숭유억불이라는 국법의 지엄함 속에서도 정리로 맺어진 퇴계가문과 용수사 스님간의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이 같은 선업으로 이어져 왔기에 도산서당 건립 또한, 용수사의 법련法蓮과 정일淨一스님이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퇴계 선생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경주에 가서 탁발 하면서까지 서당 건립에 매진하던 법련 스님의 뒤를 이어 정일 스님이 도산서당을 완성했습니다. 용수사와 도산서당, 용수사 스님과 퇴계 집안과의 인연은 지금도 이어져 도산구곡문화연대와 도운회 활동을 함께 하는 등 회통하는 유불의 전통을 잘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신재 愼齋 주세붕周世鵬매헌 금보梅軒琴輔, 겸암 류운룡謙菴 柳云龍, 양녕대군의 현손인 완산군 이축 完山君 李軸, 매원 김광계 梅園 金光繼 등 수많은 유생들이 이곳 용수사에서 학문에 매진하여 나라를 떠 바치는 동량이 되었습니다.조선시대 용수사의 역사에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주석駐錫했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서산대사의 청허당집淸虛堂集에 의하면 선조11년(1578년) 봄 용두산 용수사 극락전 공사를 계획하여 61세던 되던 1580년에 아미타불을 모신 3칸 규모의 황금 전각 극락전을 완공, 그해 삼월 상한 용수사에 묵으면서 극락전 기문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명대사 유정惟政도 임란 중 승병을 이끌고 용수사에 머물렀습니다. 일주문 밖 들어오는 초입의 하마비는 그때 사명대사와 승병들이 말을 매어 두었던 역사적인 장소이고 우측의 취규정翠虬亭은 안동 의병장 용담 임흘龍潭林屹의 정자인데 사명대사 친필 편액이 지금도 걸려 있습니다. 우승지와 대사간을 지낸 이세택李世澤이 쓴 용산지龍山誌에는 용수사 주변에 동암東庵과 서암 西庵은 물론 뒤편 산 위에 영은암과 그 위에 백운암白雲庵이 있었으며 용문교龍門橋와 태조 왕건이 3일간 머물렀다는 대왕수大王藪에 대한 기록이 전해오고 있습니다.오늘날의 용수사는 을미사변 나던 다음 해인 1895년 폐사지가 된 이곳을 1992년 (불기2536년) 불국선각 원행스님이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일대 2만평 부지를 매입하고 나서부터입니다. 문경 봉암사鳳巖寺, 수원 봉녕사 奉寧寺, 캐나다 벤쿠버 서광사 瑞光寺, 양산 통도사 서취암通度寺 西鷲庵, 상주 상안사 詳安寺를 있게 한 원행스님이 크게 지팡이를 한번 휘두르고 포효咆哮하니 수 만의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그 옛날 삼국시대부터 고찰이 있던 이곳에 백련白蓮의 인연이 싹트게 되었으니 묘법의 오묘한 조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994년 9월 19일 요사인 마의당麻衣堂과 월오관月午觀이 각각 98평으로 완성되고, 그해 12월 11일에 정면, 측면 각각 3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은 대웅전(44평)과 산신각의 낙성식이 있었습니다. 1995년 6월 26일에는 대웅전 석가모니 부처님 점안식이 거행되었으며 96년 9월 29일(음)에는 대웅전 후불정화 및 신중정화, 문수 보현불상 점안식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작불사를 지켜보는 이들이 하나 같이 말하길 절 영조의 백미를 보았다 했으니 부처님 전당을 대하는 스님의 정밀함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입니다.이처럼 세상에 나아가서는 장대한 일들에 용맹정진한 원행스님이었으나 수선修禪에 몰두한 삶 또한, 달을 두고 맑은 물에 맹서한 초발심의 여법을 향한 여여한 길이었으니 어찌 이것을 이루 다 말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통도사에서 월하 종정을 은사로 출가한 후 오대산 월정사, 봉암사, 김천 직지사, 의성 고운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선안거하며 월하 月下, 서암 西庵 두 분 종정을 스승으로 모실 때 서암西庵 큰스님께서 이·사의 경계에 걸림 없이 자유자재한 원행 스님을 일러 일천 봉우리 위 송암이라 상찬했으니 어떤 범부인들 감히 우러러 보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더러 절을 경영함에 있어서도 갖춤 뒤에 오는 꾸밈처럼 법도가 가지런했으며 험한 일을 하는 비복을 대함에 있어서도 자애로움을 잃지 않았으니 그 은택 입은 이들이 한 결 같이 스님 대하는 것이 마치 천개의 강 위에 떠오른 달처럼 흠모하며 공경해 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사제인 상운祥雲스님에게 주지의 소임을 맡기고 나서 용수사는 한 층 더 절다운 절로 변모를 시작했습니다. 해결해야할 사안을 두고 두 분이 기꺼이 말하고 따르는 것이 어떤 때는 어버이와 자식 같았고 어떤 때는 피를 나눈 형제와도 같았습니다. 두 분 사이를 나 같은 우둔한 사람이 보아도 도모하는 것마다 풀리지 않은 일이 없었으니 신비로운 이적이라 할 만 했습니다. 한 번은 김휘동 안동시장이 재임시절 손수 국립 중앙도서관에서 마의태자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복사해온 것을 필자의 손에 꼭 쥐어주며 이 길로 도산으로 달려가 상운 스님을 꼭 뵙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시장님의 말씀인 즉, 상운 스님이 천년 후에 부활한 마의태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반신하는 맘보다 반의의 생각이 더 컸으나 기적은 그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신라가 망하고 금강산에 숨어 들어가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생을 마감했다는 패배한 역사가 아니라 대륙을 호령했던 웅혼한 마의태자의 역사가 용수사를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이 세상 밖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매일신문과 안동MBC에 보도 되는 등 언론의 이슈로 등장했으며 이로 인해 매년 용수사에서 전국적인 ‘마의태자 시 낭송회’와 국책사업인 3대문화권 사업에서 마의태자 길이 조성될 수 있었습니다. 용과 관련된 이야기도 신기롭기만 합니다. 일주문을 지나 절 입구의 우측 큰 바위에는 커다란 용 발자국이 움푹 찍혀 있습니다. 일명 용족암龍足巖인데 그 앞을 용계천龍溪川이 흘러가고 있으며 용화전龍華殿과 용수사龍壽寺 그리고 절 정상의 용두산龍頭山과 용정龍井이 더해져 육룡이 용수사를 둘러싸고 전설처럼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상운 祥雲 스님의 속명이 용이 일어난다는 뜻을 지닌 기용起龍이고 법명은 상운祥雲이니 일찍이 이 땅의 주인이 필시 예견되어 있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딱딱 이치에 들어맞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참으로 그 인연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이라도 하듯 용이 승천하려면 발 밑 구름을 찍어 차고 머리 위 상서로운 구름은 올라타야 하는 바, 용수사의 아랫마을이 구름이 모여 있다는 의미를 지닌 운곡雲谷이고 윗마을은 상서로운 구름이라는 뜻의 상운면祥雲面이니 중생의 눈으로 이 희한한 조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상운 스님을 위해 만상萬祥이 존재하는 것처럼 펼쳐져 있으니 그저 감탄이 절로 나와 감복할 뿐 이 기묘한 인연은 오묘한 필설로도 풀어 쓸 도리가 없을 듯 합니다. 용수사의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탈북 돌부처의 이야기도 이 같은 한 단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어느날 원행스님께서 지나가는 말처럼 필자에게 탈북 돌부처 이야기 한 것을 글로 다듬어 신문에 기고를 했더니 중앙 KBS, MBC, SBS 등 유력 언론에서 앞 다투어 취재하고 방영하는 바람에 용수사에 모셔진 탈북부처님(일명 소원을 들어주는 만남과 기적의 탈북1호 통일 미륵부처님)을 보려는 사람들이 지금도 전국에서 찾아들고 있습니다. 대구의 김복자 金福子 水月性 보살님의 시주와 불자님들의 원력이 어우러져 탈북 돌부처를 모신 용화전龍華殿 낙성식을 2010년 5월에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영광 뒤엔 보이지 않은 수고로움과 고통도 뒤따랐습니다. 부처님의 법이 높아질수록 데바닷타가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세존을 해치려 했듯 무애無碍 국사의 법을 이어온 용수사의 위상이 올라갈수록 동정각 動靜閣건립을 그르치려는 간악한 시속 무리의 방해 또한, 도를 더해 갔습니다. 부처님 전당 건립에 쓰일 나라 예산을 자기 속주머니 돈 인양 마음대로 쥐락펴락하기 일쑤였는데 그 장난이 희한할수록 데바닷타의 음모가 부처님 손바닥 안이듯 동정각 불사의 큰 뜻은 새벽이 깊어 갈수록 더 또렷하게 어둠을 잠식한 빛이 존재감을 드러내듯 소인배의 작당을 가차 없이 물리쳐 버렸습니다.동정각을 지으려고 땅 파기를 하다 발견한 천년 넘은 통진대사洞眞大士 부도탑비浮圖塔碑와 우리나라에서 제일로 크고 견고한 법고法鼓가 알 수 없는 사람에 의해 그날 동시에 시주가 된 것은 법계의 오묘한 실상의 인연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바가 없는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그러니까, 그날 밤은 현수스님과 부전의 소임을 나누고 지고 있던 봉행스님이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어 2시에 일어나는 100일 회향 기도 중, 마지막 7일을 잠 한 숨 자지 않고 기도드리던 그 마지막 날 밤이었고, 그 100일은 봉행 스님과 목탁새가 목탁을 함께 치는 기이하고도 신비로운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이제 갓 서른을 조금 넘긴 봉행스님이 원행스님이 흐뭇한 모습으로 지긋이 바라보는 가운데 법상 위에서 사자후를 토하며 법을 설하는 모습의 꿈을 꾸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절 들어오는 초입에서부터 천개의 돌탑을 쌓은 일화日華 처사 또한 나와 똑 같은 꿈을 언젠가 꾼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린 손자 동현이를 데리고 묵묵히 기도하며 채공과 공양주의 소임을 다해내고 있는 김경남 보문궁 보살과 원행스님 시봉에 공덕이 큰 만월행 보살 또한, 그와 같은 꿈을 이미 예전에 꾸었다고 했습니다. 하도 기이한 일이어서 나는 이 꿈 이야기를 그날 오전에 상운, 현수 스님에게 해 드렸는데 두 분이 빙그레 웃으시는 모습이 마치 이날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알고 있다는 표정 같았습니다. 휴일이던 그날 오후 2시 쯤 같은 꿈을 꾸었던 우리 일행이 마침 굴삭기 땅 파기를 하는 곳을 우연히 바라보다 잘 다듬어진 돌 하나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을 보고 기이한 생각이 들어 기계를 멈추고 돌을 뒤집었더니 학계에서 그처럼 찾던 천년도 더 된 통진洞眞 대사의 행적이 새겨진 탑비塔碑였으니 이 형언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2012년 5월 초순에 시작된 동정각 공사는 필자와도 인연이 깊은 남제수 거사가 토목공사를 맡음으로서 시작이 되었는데 이것이 마무리된 것을 전후로 110평 동정각의 대들보와 도리, 서까래가 될 나무들이 도착을 했습니다. 맞배지붕 형식의 공양간 동정각은 오래전부터 원행스님과 경향 각지의 불사를 함께 했던 대목들이 참여를 했습니다. 김응한 도편수를 비롯하여 김응민, 최희영, 김시훈, 배호성, 변재봉, 박용관씨 등이 부편수로 일을 분담했는데 오랜 연륜 탓인지 일의 진척이 아주 빨랐습니다. 편액 동정각의 동정動靜이라는 의미는 화엄의 깊은 철학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본체와 현상계, 또는 현상과 현상이 대립하면서도 서로 융합하여 끝없이 전개되는 역동적인 큰 생명체이듯 나아가는 것과 머무르는 것은 둘이면서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이 논의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 온 유자儒子들의 마음의 변화를 두고 논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자학의 조종인 송나라 사람 주희가 말하길 “리理에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기에 기氣에도 동정動靜이 있으며, 만약 리에 동정이 없으면 어떻게 기氣에 동정이 있겠느냐」라고 설파한 이치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대저 퇴계와 고봉高峯의 사단칠정 논쟁과도 맥이 닿은 심학의 요체인 체와 용을 두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동정이라는 편액의 두 글자가 말하는 바는 단 하나입니다. 부처님과 같은 삶을 살아가라는 권유입니다. 이러한 삶이 무상정등정각을 이룬 인간이 찾아낸 최상의 세계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려는 것입니다.사부대중이시여! 모든 사물은 제각기 대립하고 차별하는 한계를 지니면서도 언제나 평등한 본체를 지니고 있으며 홀로 있거나 홀로 일어나는 일이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이 되는 연기의 무한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으니 진공묘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왕 이 세상에 왔다면 이러한 바를 깨달아 우리 모두 최상의 인간이 되어보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성불하십시오. 2012년(양) 7월 22일안동시 역사기록관 최성달 작가의 용수사 동정각 상량 기문을 청남 권영한 쓰다.
최종편집: 2026-06-14 00: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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