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목의 본관은 황성이고 호는 월천 자는 사경이다. 중종19년(1524)예안현 월천리에서 태어났다. 현재 이곳에는 조목이 제자를 가르치던 월천서당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 종택과 부용정사 동생 조정(1551~1633)의 겸재 정사는 최근에 복원되었다. 조목의 집안은 원래 강원도 황성군에서 세거했으나 정선군사의 벼슬을 지낸 5대조 온보가 여말선초에 경상도 문경군으로 이주하고 그의 아들 오가 예문제학에 오르자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고조부 장은 생원 진사 양과에 합격했으나 병으로 벼슬하지 않고 손경의 딸을 아내로 맞아 예천군 금당실에 터전을 잡았는데 증조부 윤손과 조부 경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조목 집안이 대대로 예안현에 자리를 잡은 것은 부친 대춘 때부터인데 그는 군수를 지낸 안동권씨 수익의 딸을 아내로 맞아 2남 3녀를 두었다. 조목이 이황 문하에 들어간 것은 15세(1538년)되던 해인데 스승 퇴계는 그때 38세로 정6품 좌랑의 지위에 있었다. 당시 퇴계는 모친 박씨의 상을 당해 예안에 내려와 있었다. 이때부터 이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스승 퇴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21세(1544년) 때는 풍기군수로 있던 신재 주세붕의 가르침을 받아가며 풍기향교에서 공부했다. 이듬해에는 안향을 모신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유람했다. 1546년 5월 어머니를 여윈데 이어 1548년 4월에는 백씨 숙과 사별했다. 조목이 실질적으로 집안의 장자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이처럼 형 조숙이 딸만 둘 낳고 일찍 죽었기 때문이었다. 조목의 누이들 또한, 각각 금희· 권중기· 금란수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들은 모두 예안지역에서 탄탄한 경제력을 구축하고 있던 사족들이었다. 어머니 삼년상을 마친 조목은 1549년 26세의 나이로 안동의 재지사족인 안동권씨 개세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조목이 생원 회시에 합격한 것은 그의 나이 29세(1552)되던 봄이었는데 이를 기반으로 그 다음해 12월 상경하여 성균관에 유학했다. 하지만 성균학 유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해 주세붕을 찾아뵙고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조목이 다시 성균관에 유학한 것은 1557년 4월이었다. 이듬해 5월에는 월란사에서 독서하며 퇴계와 서찰로 질의와 응답을 계속해 나갔다. 36세가 되던 1559년 정월에는 권대기와 부용산에 올라가 독조동에 정사 세울 뜻을 모았으며 3월에는 청원대를 쌓았다. 그리고 이듬해 4월 스승 이황을 모시고 고산을 유람했다. 38세(1561년)에는 이황에게 글을 올리고 부용산 대호를 정했으며 39세에는 이황을 모시고 취미봉에 올랐다. 조목은 말년의 스승 퇴계와 늘 함께였다. 1563년(40세) 3월 스승 퇴계가 월천 집에 식량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쌀을 보내왔다. 퇴계가 조목에게 쌀을 보낸 건 그전에도 여러 번 있었다. 그해 8월 도산서당에 가서 스승 퇴계를 찾아뵙고 경학을 강론했다. 이듬해 7월에는 퇴계와 더블어 자하봉에 올랐다. 1565년 9월에는 역동서원 건립문제로 월천 남쪽 능운대와 오담을 퇴계와 둘러보았다. 1566년(43세)2월 장사랑 공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는데 다시 1568년 6월 집경전 참봉에 제수되자 8월에 부임했다가 12월에 사직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70년(47세)안동지역 최초의 서원인 역동서원을 스승 퇴계와 창설하고 춘추 제향할 때 상용으로 올리는 축문을 초했다. 8월에는 우탁의 위패를 봉안했다. 그리고 특히 이해는 7월부터 스승 퇴계를 모시고 역동서원에서 심경을 강론했는데 11월 들어서면서부터 퇴계의 병세가 완연해지자 약을 구해 올리는 등 정성을 다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12월 8일 스승 이황이 세상을 버리자 문도를 모아 장사를 지냈다. 그 자신 고제답게 1년 동안 베로 만든 띠를 매고 3년 동안 부인이 있는 안방에 들지 않았으며 잔치에도 일체 발걸음 하지 않았다.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난 뒤 조목은 1572년(49세)동문들을 모아 도산서원을 세울 것을 논의하고 먼저 스승 퇴계의 유업을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5월에 이황의 ‘언행총록’을 작성하고 ‘퇴계연보’를 초했다. 이듬해 4월 부친상을 당하여 8월에 부용산에서 장례를 치르고 모친 권씨와 합장했다. 상중이던 6월 이조와 삼공이 학문과 행실이 저명한 인물로 조목을 천거했다. 1575년(52세)8월 도산서당 뒤편에 서원이 낙성되자 도산서원이라는 한석봉 글씨를 선조로부터 사액 받았다. 1576년 2월에는 도산서원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는 제문을 초했으며 같은 해 5월에는 이황이 엮은 ‘이학통록’의 발문을 지었다. 그리고 8월에는 도산서원 춘추향사에 상용하는 축문을 지었다. 스승 이황을 추모하는 유업을 마무리한 조목은 1577년(54세)정월 봉화 현감에 부임하여 향교에 생도들을 모아놓고 ‘소학’과 ‘대학’을 강의했는데 먼 지방 선비까지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바람에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 이듬해에는 봉화향교를 중수했다. 9월에는 고향 월천서당과 도산서당에서 ‘소학’과 ‘대학’을 강의했다. 조목은 소학과 대학을 교학의 출발로 삼을 만큼 그 어느 경서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1580년(57세)에는 ‘주자대전’을 초해서 한 책으로 만들어 ‘주서초’라 하고 선현들이 언급한 말을 기록하여 ‘곤지잡록’이라 했다. 1587년(64세)5월 여강서원에 동문을 모아놓고 ‘퇴계선생문집’을 교정했다. 1588년 정월에 합천군수에 부임하여 1590년 5월 퇴직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목은 금란수 김부륜 이숙량 오수영 윤의정 이종도 서천일 등과 군량미를 거두어 향병에게 전달하는 군수 보급의 책임을 맡았다. 1594년 6월 역동서원에 머물면서 제생들에게 ‘심경’을 강론하다 10월26일 월천서당으로 돌아왔다. 1595년(72세)에 ‘고경중마방’을 손수 베꼈으며 1596년에는 체찰사 이원익이 찾아와 일본과 화의하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기에 “오늘의 관점에서 본다면 곧 진회가 옳고 제갈공명이 잘못되었구먼.”이라는 말로 일본과의 화의를 강력 반대했다. 1598년 8월 예천 금당실에 있는 선조의 묘소를 보살피고 12월엔 동강에 내린 눈을 감상했다. 1599년 정월. 76세 노구의 몸으로 도산서원 사당을 참배하고 7월에 백운동서원을 둘러보았다. 1600년 5월 퇴계문집 간행을 마무리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77세였다. 1601년 10월 이산해가 쓴 천연대 글자를 도산서원 입구 바위에 새기고 사당에 고했다. 11월에는 춘당 오수영과 청량산을 유람했다. 1603년(80세) 정월, 1604년(81세) 정월에도 기력이 쇠한 노구의 몸을 이끌고 도산서원과 역동서원의 사당을 참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2월에는 매부이자 평생 동지였던 금란수가 세상을 떠났다. 3월에는 도산서원에서 유숙했다. 9월에 부용정사 8칸이 완성되었고 11월에는 공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퇴계학단을 대표하는 그에게 조정에서의 40여 관직의 부름이 거듭되었으나 대부분 이처럼 나아가지 않았다. 나아간 것이라곤 봉화현감, 충청도 도사, 합천군수 등 몇 관직에 불과했다. 1605년에 이어 1606년 정월에도 도산사당 참배를 마치고 8월에는 외조부의 기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두달 후 10월에 마침내 조목이 83세의 일기로 운명했다. 조정에서는 그의 부음을 듣고 재상이 모두 조문하는 글을 짓고 부조했다. 1607년 정월 부용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이후 1615년 11월9일 조정에서 조목을 도산서원에 종향하라는 교지가 내려졌다. 조목은 이외에도 1611년 창설된 봉화의 문암서원과 1612년 예천 유생들이 창설한 정산서원에 종향되었다.      
최종편집: 2025-05-09 14: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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